★- 피뜩 들렀다가 함방눈의 요청으로 이글 또 올린다. 근데 이글 퍼날그기 엄끼. 내가 책광고 해주는데..부타그 받구. 3~5집까지...
3,신의주특구 미스테리
김 사장은 과거에 나진·선봉지역에서 경제특구를 실시해본 적이 있지만 그리 성공한 편은 아니라고 일러주었다. 그러면서 중국에서 자라고 서방교육을 받았으며,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무역으로 성공한 사업가에게 이 작은 경제무역구의 정권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나진·선봉지역의 북한 관리보다 더 많은 권력을 주겠으며, 토지는 양빈 개인이 지배하고 거기에서 나는 이익은 양빈이 북한에 투자한 농업사업에 대한 보답으로 여기겠다는 것이었다. 기업과 자본금을 유치하는 일을 비롯해 모든 일을 그에게 맡기고 심지어 얼마간의 자본주의를 실행해도 괜찮으며 국제적으로 유행하는 ‘시장경제’를 실험해봐도 무방하다는 이야기였다.
“양빈 총재, 지금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결심이 서면 저에게 일러 주십시오. 그러나 한번 대답하면 꼭 성공해야 합니다. 나진·선봉지구보다 훨씬 더 잘해야 됩니다.”
양빈은 김 사장을 보낸 후, 혼자 앉아서 담배를 피웠다. 생각에 잠길 때면 그는 담배를 피곤 했다.
다음날 양빈은 김 사장에게 북한 정부가 자신을 믿어주는 것과 김 장군의 두터운 사랑에 감사를 표시했다. 그는 북한 정부가 그에게 설립권을 보장해준 신의주 경제무역구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나진·선봉지구보다 잘하겠다고 결심했다.
“달러를 뭉치로 털어놓게 만들겠다”
다음날 양빈은 김동규 사장과 외무성, 무역성 관리들의 안내로 신의주를 답사했다. 북한측이 제공한 27㎢의 경제무역구는 압록강대교와 중국 세관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었고 교통도 아주 불편했다. 항구와 비행장이 없어서 국제 투자유치와 건설에 어려운 점이 매우 많았다.
1차 답사를 마친 양빈은 북한측에 27㎢의 무역구는 반드시 새로 계획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국제표준에 의거해 건설해야만 외국기업을 유치할 수 있다고 일러주었다. 27㎢로는 각종 도로와 기초시설을 건설하고 나면 외국기업가에게 제공할 땅이 없으며, 국제적인 오피스텔을 건설하기는 더욱 힘들다고 말했다.
“외국기업가들과 전문가들이 먹고 마시고 싸고 자는 곳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들의 부인이나 애인이 오면 어디에서 잡니까? 서양사람이나 일본사람도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양빈이 웃으면서 북한 관리들에게 말했다. 계속해서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던 북한 관리들도 그제서야 씩 웃었다.
“샹젤리제, 힐튼 같은 오성(五星)급 호텔은 물론이고 별장도 있어야 합니다. 서양기업가나 관광객들에게 꼭 보여줘야 합니다. 조선 신의주 경제특구는 세계 어떤 자유무역구와 비교해도 질이 떨어지지 않을 뿐더러 훨씬 멋지다는 것을 말입니다.”
양빈이 계속해서 말했다. “저는 신의주 경제무역구를 세계 일류로 만들겠습니다. 세계 각국의 기업가나 관광객이 이곳에 와서 풍경을 보고 싶도록 만들고 달러를 뭉치로 털어놓고 가게 하겠습니다. 동북아시아의 진주, 그 진주를 한국, 아 미안합니다. 남한이나 일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 신의주에서 찾도록 하겠습니다.”
양빈의 연설은 열정적이고 유머러스했으며 선동적이었다. 북한 관리들은 잇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양빈은 마지막으로 한 가지 방안을 내놓았다. 즉 비행장과 항구를 특구 안에 두고 무역구의 면적을 확충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북한측 인사들은 중앙에 보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양빈의 갑작스런 제안에 북한측은 신속하게 대답해왔다. 김정일은 양빈 총재의 뜻대로 특구 면적을 82㎢로 확충하고, 북신의주 전부를 그 안에 넣어 신의주 경제특구로 명명하라고 지시했다.
가난하게 자란 유년시절
양빈의 경력에 대한 매스컴의 보도는 각기 다르다. 양빈은 2002년 3월6일 자신의 과거에 대하여 나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나는 불우한 운명이었죠. 부친이 병으로 일찍 세상을 뜨는 바람에 다섯 살 때 고아가 된 신세였죠, 그래서 할머니가 나를 키웠어요.”
1963년 2월11일, 난징(南京)에서 태어난 양빈은 할머니에 의지해서 살아왔다. 이렇다 할 재산도, 수입이 없어 아이스크림 하나 살 돈도 없었다. 나중에 양빈의 할머니는 길가에서 한 컵에 1전씩 받고 차를 팔아 생계를 유지해나갔다. 어린 양빈은 늘 끼니를 굶어야 했다. 여덟 살 무렵엔 매일 오후 4시가 되어서야 할머니와 함께 시장에 가서 채소를 사왔다. 하루중 그때가 채소값이 가장 저렴하기 때문이었다.
양빈의 친지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1981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양빈은 720공장에 취직하였고, 1982년 1월 해군 제2포병부대에 입대하였는데 그 포병중대는 다롄(大連)에 있었다. 1983년 9월 그는 부대에서 시험을 통해 해군 제2포병대학원에 입학했으며 ‘전자공학’ 전공의 전문대 3년과정 공부를 하였다. 1986년 졸업 후 군교에 남았으며 나중에 대학원 근무중대에서 병장이 되었다. 1988년 2월부터 1989년 11월까지 난징 690공장에서 근무하였다.
1987년 12월 양빈은 군교에서 제대했다. 그러나 그는 취직을 서두르지 않았다. 당시 그에겐 제대할 때 받은 약간의 돈이 있었는데 그는 그 돈으로 먼저 난징대학의 단기 영어강습반에 참가하여 영어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중국대륙에서는 출국 열기가 한창이었다. 그때부터 양빈의 마음속엔 해외유학이란 싹이 움트기 시작하였다.
1989년 2월 양빈은 네덜란드 유학을 신청했다. 왜 하필 미국이나 유럽의 다른 나라가 아닌 네덜란드였을까? 아마도 난징대학에 유학 온 네덜란드 여학생과 관련되는 것 같다. 그들이 난징대학에서 서로 얼굴을 익혔기 때문이다. 양빈은 1989년 10월 네덜란드로 갔다.
(계속)
4,네덜란드에서 대박 터뜨리다
양빈이 네덜란드에서 ‘금노다지를 캐기 시작’한 것이나, 그가 귀국해서 경영에 착수한 일은 같은 맥락에서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양빈은 네덜란드에서 품팔이를 해서 번 2만달러로 값싼 중국의 방직품, 생활용품을 네덜란드에 들여와 판 덕에 불과 몇 년 만에 부호로 변신했다.
양빈은 창업에 첫걸음을 내디디면서 선택을 가장 중요시했다. 그는 자신이 네덜란드에 유학하고 있을 때 유럽을 유심히 관찰했으며 유럽을 충분히 이해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유럽보다는 중국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다. 양빈은 사람들이 그때까지 눈을 돌리지 않은 분야를 선택하기로 했다. 거기에는 경쟁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예리한 눈으로 기회는 이제 막 개방정책을 펴는 폴란드에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바르샤바에서 폴란드 사상 최초의 민영기업을 등록했다. 이 일은 당시 폴란드와 서방 매스컴으로부터 커다란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양빈은 국제무역을 하기로 결심하고 먼저 고향인 중국 난징으로 갔다. 그곳에는 동창이며 친구, 전우, 스승을 포함한 그의 인맥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계획을 여러 사람에게 이야기했다. 친구들은 아이디어를 내가며 그에게 장쑤성의 실크-방직수출회사의 사장과 경리들을 소개해 주었다. 덕분에 그는 장쑤성(江蘇省) 일대의 향진기업(중국의 鄕은 한국의 면, 鎭은 읍에 해당됨)에서 싸고 질 좋은 의류, 일용품을 살 수 있었다.
양빈의 사업은 점점 번창했다. 그는 중국의 생활용품, 완구, 면직물, 실크류들을 동유럽과 독립국가연합체(CIS) 국가로 계속해서 운반했다. 불과 2년 만에 그의 총자산은 2000만달러로 불어났으며 네덜란드에서 ‘네덜란드유라시아’ 회사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1996년 양빈은 농업에 투자하기로 결정하고 네덜란드 농업모델을 중국에 들여오기로 했다. 그러자 유럽에 있던 중국인 친구들은 모두 그의 결정에 의아해했다. 왜 중국으로 돌아가서 농민 노릇을 하려고 하는가? 그때 유럽에 살던 100만 화교 중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들은 모두 선진적인 기계업, 컴퓨터업이나 화공산품 사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양빈은 진지하게 해보고자 결심한 일은 꼭 해내는 사람이다. 그는 화훼시장과 녹색농업 분야를 정확히 내다보았다. 그는 먼저 중국내 유명 도시의 무역도매시장에 파고 들어 수요와 공급 사정을 파악했다. 중국 사람은 화초를 무척 좋아해서 화훼도매시장이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그는 차츰 화훼 상품이 대부분 전국 각지의 온실에서 재배된다는 것과 그 온실 설비가 아주 허술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화훼 사업자들은 하루빨리 첨단설비를 들여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정보는 그가 중국 농업에 투자하겠다는 결심을 하게끔 하였다. 그는 개혁개방 후 중국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빠르게 향상된 데에 흥분했다.
1996년 말부터 이듬해 초까지 그는 자본 운영을 통해 네덜란드에서 2개 회사를 사들였는데 그 중 하나는 70년 역사를 지닌 온실기업이었고 다른 하나는 냉장회사였다. 결국 그 두 회사가 네덜란드 농업을 중국에 끌어들이는 기반이 되었다.
그는 베이징, 상하이, 다롄, 광저우, 청두 등지에 있는 도매상들과 공급계약을 체결하고 곧바로 밤을 새워 네덜란드로 돌아가 수출화물을 선적했다. 며칠 후 1000만달러 상당의 네덜란드 화훼와 모종, 종자가 속속 고객의 손으로 들어가 불티나게 팔렸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네덜란드촌
2002년 3월6일, 필자는 처음으로 선양의 네덜란드촌을 방문했다. 한낮의 네덜란드촌은 정말 아름다웠다. 건물과 정원이 유럽 고전주의 스타일로 꾸며져 있었다. 외관은 네덜란드 역사에서 유명했던 건축물을 그대로 따왔으며 자연과 지형이 조화를 이루는 네덜란드의 공원들을 전면적으로 본땄다.
해적선과 풍차는 네덜란드 왕국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네덜란드촌의 입구에 서있는 해적선과 풍차는 촌중심에 있는 시티광장과 네덜란드 여왕궁과 잘 어울렸다. 우리는 우선 이름난 네덜란드촌의 국제컨벤션 센터를 찾았다. 이곳은 암스테르담 기차역을 그대로 본따 1대1의 비례로 건축한 것이다. 양빈은 이 공사에 2억위안(元)이 넘는 투자를 했다. 로비를 지나 2층에 도착해보니 전체 네덜란드촌의 미니어처가 마련되어 양빈의 예술 걸작품을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현대 도시농업과 유럽식 공원이라는 주제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네덜란드촌은 동서로 나뉘어 있었다. 동쪽은 별장지대, 빌라, 3성급 호텔이 들어서 있었고 5성급 하이야대주점, 금융빌딩, 피트니스센터, 사우나, 가라오케, 쇼핑몰, 우체국, 학교 등의 시설도 갖추려고 했다.
서쪽은 하이테크농업산업원과 농업관람, 관광구역이었다. 암스테르담 기차역-국제컨벤션센터는 바로 관광구역 안에 있었다. 해외 바이어클럽은 네덜란드 헤이그 국제재판소 건물을 1대1의 비례로 건축했다. 건물 내부의 1층 로비는 2차대전 후 나치를 재판하던 모습 그대로 설계됐고 2,3층엔 초현대식 엔터테인먼트 시설을 갖춘 고급 객실과 세계의 유명 미식센터가 들어와 있었다. 이것은 답사, 관광, 투자차 방문 온 바이어들에게 우수한 상담환경과 비즈니스 환경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형 화훼 전시센터는 철근유리구조로 둘러싸여 햇빛이 유리관을 비출 때마다 황금빛으로 번쩍여 장관을 이루었다.
(계속)
5,북한 대표단, 네덜란드촌 방문하다
선양 네덜란드촌 입구에 세워진 풍차. 양빈은 네덜란드촌의 외관을 네덜란드 역사상 유명했던 건축물을 그대로 모방해 만들었다.
선양에 돌아온 후, 양빈은 여러 가지 사업을 준비하느라 쉴 새 없었다. 홍콩에서 유라시아 주식회사를 돕고 있는 리잉저우(黎瀛洲) 변호사, 저명한 컨설팅회사 화쥔(和君)의 이사 겸 사장인 리수(李肅), 홍콩과 마카오 경제특구의 기본법을 만든 마카오대학 법학원의 뤄웨이젠(駱偉健) 교수 등을 초청해 경제특구의 법률문서를 만들 준비를 하였다.
3월6일 저녁, 양빈은 네덜란드촌의 ‘백조의 호수’ 옆 열대우림홀에서 미국 MGM의 아시아 부총재 일행을 맞았다. 그들은 여행 합작 프로그램의 타당성을 조사하기 위해서 온 것이다. 유라시아의 부총재 리강, 스쥔 및 외지에서 온 마닝, 베이징 수도공항의 젊은 전문가 등이 동행했다. 필자는 작가로 초청을 받아 오른쪽에 앉았다. 그 자리에서 나는 마닝과 왕뤄(王諾)를 처음 만났다.
3월7일 새벽 3시경, 양빈, 스쥔 및 마닝, 왕뤄와 베이징수도공항의 엔지니어 일행은 열차를 타고 선양을 출발하여 아침 7시경 단둥에 도착하였다. 단둥시 책임자가 기차역에서 일행을 마중하였다. 이들은 함께 아침식사를 하고 신의주 경제특구 건립에 쌍방이 합작하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시간 후 양빈 일행은 압록강을 건너갔으며 북한 원예총사 김동규 사장이 외무성, 무역성 등 정부관리와 함께 북한 세관에서 그들을 영접했다. 양빈 일행은 신의주에 단 하나뿐인 외국인 접객업소인 압록강호텔에 묵었다.
북한측은 이미 지도를 준비하여 82㎢ 둘레를 붉은 선으로 그려놓았다. 기획책임자인 왕뤄는 후에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조선측은 우리에게 지도를 보여주었습니다. 붉은 선으로 표시한 82㎢는 북신의주와 압록강의 몇 개 섬 및 바다와 인접한 지역을 포함합니다. 우리는 차를 타고 지도상의 붉은 선을 따라 한바퀴 돌면서 지형, 공항, 항구 등을 관찰하였습니다. 공항은 원래 일본 사람들이 건설한 군용이었으나 북한측은 특구를 위해 민용공항으로 바꾸려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항구는 크지 않아 3000t급 화물선이 정박할 정도였습니다. 나는 무역 항구로는 미흡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국제 해운에서는 적어도 1만5000t급 이상의 화물선이 정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곳은 수심이 깊지 않아 큰 배가 들어올 수 없기 때문에 발전 가능성이 없습니다. 반드시 수심이 깊은 다른 곳을 택하여 항구를 건설해야 합니다.”
그날 저녁, 북한측 대표단(원예총사의 김 사장을 수석대표로, 외무성, 무역성 등 부위(部委)급 및 과학원 경제전문가들로 구성되었다. 이후 신의주특구에 대한 협상은 모두 이 대표단이 추진하였다. 북한측 대표는 나중에 몇 명 추가됐다)이 양빈 일행을 초청했다. 협상에서 북한 대표단은 3월 하순에 네덜란드촌을 방문하여 신의주경제특구 문제를 다룰 첫 회담을 진행하기로 하였다.
2002년 3월8일 양빈 일행은 신의주에서 선양으로 돌아왔다. 양빈은 법률전문가들에게 경제특구와 관련된 서류를 준비하도록 요청하는 한편, 3월7일 북한측에서 제공한 지도에 근거하여 신의주 경제특구의 모래지도 모형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이 신의주 모래지도 모형은 순전히 양빈의 구상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으로 2주 안에 완성하여 곧 방문할 북한 대표단에게 보여주게 될 것이다.
필자는 4월에 이 모형을 처음으로 보았다. 이 모형을 보면 신의주 경제특구가 유럽풍의 매우 현대화된 도시로 구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도시는 넓은 길을 경계로 동서 두 부분으로 나뉘었는데, 서쪽은 높은 건물과 아파트가 숲처럼 솟아 있으며 압록강변의 큰길은 녹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동부는 공항, 현대화된 공장, 농업기지 등이다. 모형 위에는 특별히 교회와 사찰을 표시해 두었으며 기독교를 믿는 서양 사람들과 불교를 믿는 동양사람들이 각기 자신의 신앙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는 모두 양빈의 세심한 배려였다.
2002년 3월, 양빈은 랴오닝성 친구의 소개로 랴오닝대학 법학원 부원장으로 국제법 전문가인 둥롄파(?連發) 교수를 초청해 홍콩의 리잉저우 변호사, 마카오의 뤄웨이젠 교수가 함께 작성한 법률서류에 대하여 국제법 측면에서의 조언을 요청하였다. 둥롄파 교수는 양빈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2002년 3월31일, 북한 대표단 12명이 선양에 도착했다. 양빈은 마닝, 리강, 스쥔, 저우샹 등과 유라시아그룹 관계자들과 함께 도선공항에 마중나갔다. 북한 대표단이 도착하자 대기중이던 젊은 여성들이 손님들에게 꽃다발을 안겨주었다. 북한 대표단을 태운 승용차의 긴 행렬은 기세 당당하게 공항을 빠져나와 선양 환성(環聲)고속도로를 통해 네덜란드촌으로 향했다.
4월2일, 홍콩기본법과 마카오기본법의 초안 작성에 참여한 적이 있는 마카오대학 법학과 뤄웨이젠 교수가 선양에 도착했다. 양빈이 초청한 국내외 각 방면의 전문가가 모두 네덜란드촌에 도착한 셈이다.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마닝, 왕후이둥, 리수, 저우팡성, 리잉저우, 뤄웨이젠, 왕뤄, 둥롄파, 양다융, 추이양 등이다.
경제특구인가, 특별행정구인가
북한 대표단은 모두 12명으로 구성돼 있었다. 10명의 대표 중 수석대표는 원예총사의 김동규 사장이고 수석대표 비서와 통역이 포함돼 있었다.
북한 대표단은 북한 무역성, 외무성,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법제위원회, 과학원, 원예총사 사람들로 구성됐다. 그러나 북한 대표단은 시종일관 북한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 명의로 회담에 나섰다. 왜 그랬을까? 왜 정부 명의를 쓰지 않았을까? 아마도 양빈이 네덜란드 유라시아국제무역회사의 명의, 즉 사실상 개인자격으로 나섰기 때문일 것이다.
(계속)
6,양빈측 대표단은 모두 양빈이 친구로부터 추천받고 소개받아 초청한 사람들로 중국 각처에서 왔다. 양빈과 마닝처럼 네덜란드 국적 소유자도 있었지만 이들을 제외하면 모두 노란 피부에 검은 머리를 한 중국인이므로 북한측에서는 중국측 대표라고 불렀다.
제1차 회담 때 양빈측 대표단은 모두 11명이었다. 대표 8명, 변호사, 비서 2명에 통역 김호(金虎)가 동행했다. 수석대표는 양빈이고, 부대표는 마닝이다. 첫 회담이 끝난 후 왕후이둥(王惠東), 웡융시(翁永曦), 챠오성리(喬勝利) 등이 연이어 대표단에 가담했고 작가인 나는 언론고문 명의로 참석했다.
양빈대표단은 신의주특구 문제에 대한 법률문서 즉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신의주 특별행정구 기본법’(토론용)을 제출했다. 이것은 둥롄파 교수의 기본법에 홍콩 리잉저우 변호사가 작성한 ‘합의서’ 내용을 보충해서 만든 기초 문서였다.
4월4일 오전 10시, 쌍방 대표단은 네덜란드촌의 유라시아그룹 오피스텔(일명 네덜란드 여왕궁) 4층 회의실에서 첫 회담을 진행했다. 양빈은 환영사를 마친 후, 간단하게 신의주기본법을 작성한 목적과 그 배경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기본법은 미래의 특구 대법(大法)으로 중국의 홍콩기본법과 마카오기본법처럼 전세계에 공포하고 집행할 법률문서라고 말했다. 이 기본법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헌법규정에 의거해 신의주특구에 실행할 제도를 마련하여야 하며 국가가 신의주특구에서 실시할 기본방침과 정책을 보장해주어야 한다, 중앙정부는 신의주특구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것에 대해 지지하고 협조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오후에 회담이 계속되었다. 북한 대표단은 표정이 엄숙했다. 북한측 수석대표가 먼저 발언했다.
“신의주특구는 당신네 홍콩, 마카오와 다릅니다. 홍콩과 마카오특구는 자본주의를 50년 동안 계속 실행하기로 했습니다. 그것은 홍콩과 마카오가 과거 영국과 포르투갈에게 강제 침략당해 100년의 식민지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네는 제국주의의 손으로부터 그것을 회수해 조국에 반환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신의주특구는 주권국가의 영토의 일부를 타인에게 양도하여 관리하는 것입니다. 이는 세계적으로 둘도 없는 일입니다. 신의주 경제특구의 이런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북한 대표단의 법률전문가가 계속해서 말했다.
“우리의 의견으로는 특구의 이름에 특구의 성격이 반영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경제특구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나라 헌법의 해석으로는 특수한 경제구역입니다. 나진·선봉무역구는 조선에서 조선법으로 관리합니다. 신의주 경제특구의 경제책임자는 양빈 총재로 그가 전체 지구를 관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양자의 관리방식이 다른 것입니다. 경제활동은 양빈 총재가 책임지는 것이고 우리는 간섭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치안은 조선측에서 책임집니다.”
화려한 신의주 특구 모형도
북한측의 태도는 명확했다. 신의주를 특별행정구로 부르지 않고 경제특구로 부르며 양빈더러 경제활동만 책임지라고 했다. 북한이 그 외의 정치, 즉 국가기구를 맡겠으며 법률제정과 집행도 맡는다는 것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북한이 치안, 검찰, 법원을 맡는 것이었다. 특구의 모든 활동은 북한 헌법의 구속하에 있고 독립적인 행정관리권이나 입법권, 사법권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사실상 제2의 나진·선봉무역구로 장관만 북한 사람 대신 네덜란드 국적의 중국인 양빈을 앉히는 것에 불과했다.
그럴 경우 양빈은 신의주에 외국기업가를 유치하고 경제건설과 무역활동을 책임지면서도 아무런 법적인 보증을 받지 못하게 된다. 특구의 기본법이 없고, 입법·사법·행정 3권이 없기 때문이다. 북한은 다만 행정관리권의 일부분만 양빈에게 주는 것이었다.
그러자 양빈 대표단은 일제히 양빈이 신의주의 경제활동만을 책임진다면 나진·선봉경제특구와 다를 게 무엇이냐며 의견을 말했다. “사실, 나진·선봉이 성공하지 못한 원인으론 그 지리적 위치와 북한관리가 책임자였다는 점 외에도 최대의 문제점으로 국제자본과 대기업의 투자가 없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외자를 유치하려면 반드시 법률로 보증해주어야 합니다. 외국인은 법률로 판단하지 사람을 보지 않습니다. 이 점에 관해서 북한 대표단이 진지하게 고려해주시기 바랍니다.”
4월5일 쌍방 대표단은 회담을 속개했다. 북한 대표단의 법률전문가 허명규가 먼저 발언했다.
“주신 기본법을 다 읽어 보았습니다. 우리는 입법권과 사법권은 최종적으로 국가에 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신의주 특구의 법률도)중앙에서 제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양빈 총재가 경제특구에서 더 많은 권력을 행사하고 외국기업을 유치할 수 있도록 중앙에서는 일부의 입법권과 사법권을 양빈 총재에게 부여할 수도 있습니다.”
양빈은 미래의 신의주특구가 어떤 모습으로 가야 할지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설명하였다.
“조선친구들이 네덜란드촌에 도착하자마자 신의주특구의 모래판 지도를 보셨습니다. 이 82㎢의 토지 위에 세계에서 가장 완벽하고 멋진 특구를 건설하려면 그 건축은 유럽 풍격을 따라야 합니다. 저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건축 설계사들을 불러와 설계를 시킬 계획입니다. 영국 풍격, 프랑스 풍격의 건축물과 세계에서 가장 현대화된 고층건물을 짓겠습니다. 제네바처럼 나무와 잔디밭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환경보호형 특구로 가꿀 것입니다. 5년 내에 초보적인 형태의 공사를 마치고 10~15년에 걸쳐 완성할 예정입니다.
(계속)
★- 내실수로 한나 더올렸는가 큭큭대지 마라. 보너스로 한나 더준게짐. ㄲㄲ~
잼있으믄 꼬리글달라. 그챔 안올린당. 흥~
* 해동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4-08-13 13:00)